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 중에
참 행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동화책과 그 책을 그대로 녹음한 테이프가 있었고
그걸 전축으로 틀어주시면 그걸 들으며 좋아했었더랬지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께서는 책상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때 책꽂이에는 제가 좋아하는 동화책과 위인전이 빼곡히 꽂혀있었습니다
반정도는 이미 읽어본 것이었고 나머지 반은 앞으로 읽어나갈 책들이었죠
50권짜리 세트로 이루어진 위인전을 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위인들의 삶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 조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열심히 모두 읽었습니다
글 읽기를 좋아하는 습관은 여전히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버스에 앉으면 앞좌석 뒤에 붙어있는 광고지를 빠짐없이 읽어버리고
블로그나 뉴스기사를 찾아 읽는 것도 참 좋아합니다
근데 저는 지난 10년간 읽은 책이 몇권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슬픈 것은 합해도 10권이 안되는 것은 확실하다는 점일까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누구나 책을 읽는 것은 좋은 행위이다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리고 생일선물로 책을 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어릴 적엔 자발적인 독서광이었다가
책 한권 읽을라치면 담배끊는 것만큼이나 힘든 결심을 해야하는
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에 먹고사는데 걱정없는 양반들은 늘상 책을 읽었습니다
매일 뼈빠지게 일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평민이나 천민에게는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겠지만요
하지만 우리는 2012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본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어서 다들 똑똑하고
책을 읽는 것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책읽기를 멈추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건 초등학교 6학년때였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너무 안읽는다며 일주일에 한권이었나 한달에 한권이었나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더군요
담임선생님께서 첫번째로 정해준 책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야기 였고
두번째 책은 그리스로마신화 였습니다
아직도 여기까진 기억이 나네요
그 뒤로 정해준 책들은 아예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팽겨쳤거든요
저 스스로 집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읽을 땐 재미있었는데
책을 정해주고 언제까지 읽어야하고 독후감까지 의무적으로 내야하는 것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야기는 후에 중학교 때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읽기 시작했고
뽀르뚜까가 망가라치바에 치여 비명횡사하는 대목에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 재미있는 책이 왜 그때 쌤이 읽으라고 할 때는 그렇게 읽기가 싫었을까요
그리고 중학교 말기에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야자까지 하며 공부를 해야했고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했지요
한가롭게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그런 뉴스가 나옵니다
요즘 아이들 혹은 20대 30대의 독서량이 과거에 대비해 많이 줄었다거나
외국에 비해 낮다거나 해서 문제가 된다는 내용의 뉴스 말이에요
우리가 지금 한가롭게 책 따위를 읽고 있을 시간이 있나요
어떻게든 자격증 하나라도 더 따고 토익점수 1점이라도 올려서
대기업 입사해야되는데요
요즘 중학생 고등학생들은 입학사정관제 라는것 때문에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한다고 하지요
대학에 가기위해 있어보이는 책들 위주로 골라서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그렇게 하고 있겠네요
그런 포트폴리오에 제가 고등학교 때 눈 빨게져서 읽었던
서갑숙씨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같은 책들은 넣기 힘드니까요
결국 저는 인생의 중요한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그리고 모든걸 불태워야 할 20대의 황금같은 시간에
오로지 좋은 대학을 위해
그리고 대학을 가고 나서는 생활비에 시달리며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제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까맣게 모르는 채 서른살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등 큰 결심을 하고 또 성공한 사람들은 박수를 받습니다
애초에 그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시작하고 또 성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난 10년간 서울에서 모더니즘을 몸소 실천하면서
입만 열면 돈 돈 거리고 대학공부는 대학공부대로 스펙쌓기는 스펙쌓기대로 하기 싫어서
결국 뭐하나 제대로 한 것 없는 서른살 철부지는
드러워서 못살겠다 서울을 외치며 고향에 내려온지 이제 10개월째입니다
10개월동안 돈없어 굶을 걱정없이
보고 싶은 드라마 보고 읽고 싶은 글을 읽고
꼴리는 대로 막 살았는데
막 살다보니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점점 감이 오려고 합니다
서른살에 사춘기를 보내다 보니 글이 또 산으로 갑니다
한줄요약 좋아하는 것도 억지로 시키면 재미없다 그리고 우리는 책따위를 읽고 있을 시간이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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