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집에 있느냐고 물으면
제대한지 7년이 안된 예비역들은
머리를 감싸쥔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전화기를 집어던질 뻔 했다.
이건 분명히 예비군 훈련 통지서거든.
나는 그저께 저녁 박태환의 200미터 결승전을 보겠다는 목표 아래
새벽 4시까지 잠을 안잤다.
기쁜 은메달 소식을 접하고도 잠이 오질 않았다.
왜냐하면 잠에서 깨면 예비군 훈련을 가야하니까.
늦게 잔 탓에 8시에 깼다.
그것도 아버지가 깨워주셔서 겨우 일어났다.
아 귀찮다. 미치겠다. 가기 싫어.
김얀님은 빨래 널기가 우주 최고로 귀찮다고 말씀하셨는데
난 그것보다 한차원 높은, 우주보다 더 넓은 차원의 귀찮음이 바로 예비군이라고 생각한다.
'어짜피 백수로 지내는데 할 거 없을 때 후딱 다녀오자'
라는 마인드로 스스로를 몇번이나 토닥이며 겨우 모닝담배에 불을 붙이고 갔다 오자고 마음을 먹는다.
훈련 끝나고 롯데마트에 다녀오고 싶은데
이 무더위에 예비군 끝나면 땀에 쩔어 있을테니 갈아입을 옷과 신발도 챙기고.
아 차가 있으니까 이렇게 편하구나.
예비군 훈련에 가면 진정 투명인간이 된다.
내가 입소하게 되는 구미 예비군 훈련장은 도착하는 순서대로 번호표를 주고
그 순서대로 식사도 진행되고 퇴소 순서도 정해진다.
늦게 일어난 탓에 입소 시간인 9시를 10분 앞둔 8시 50분에 겨우 도착을 했다.
번호표를 받고 살짝 실소를 머금었다.
69번. 왜 하필이면 나는 예비군 번호조차도 야하냐.
다크템플러처럼 클로킹해서 다니느라 번호표를 사진으로 남겨놓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예비군복만 입으면 그냥 덥다.
소재 자체도 시원한 것과는 거리가 먼 소재이거니와(그렇다고 방한에 좋지도 못한,
뭐로 만들었는지 궁금한 소재) 무거운 군화, 그리고 방탄헬멧.
나는 평범하게 생겼지만 69라는 숫자가 적혀 우스꽝스러워진 방탄 헷맷을 쓰고,
투명인간다운 무표정으로 사격장으로 향했다.
한번도 표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름 괜찮은 사격솜씨를 지녔지만
오늘은 다섯발 중에 두발만이 표적지를 관통했다.
헤드샷도 아니고 한 귀퉁이에.
영점조절이 잘못됐거나 나머지 세발은 이 두발과 똑같은 위치를 지나갔다고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총도 마음에 안든다.
육군훈련소에서는 M16을 썼었고, 경찰학교에서는 K2를 썼었다.
이런 좋은 화기들을 내비두고 왜 칼빈이란 말인가.
원래 주어진 실탄은 6발이었는데 총기가 말썽이라 한발은 아예 쏘지도 못했다. 젠장.
땡볕아래 데워진 우레탄 바닥에 엎드려쏴를 위해 팔꿈치로 버티다 보니
사격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팔꿈치가 화끈화끈 거린다.
그래 참자. 이제 오늘이 지나고 다음에 6시간만 더 받으면 이짓도 영원히 안녕이다.
교관님들의 통제에는 바로바로 따라준다.
난 4년제 대학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니까.
누구 한사람이 어리버리 늦장을 피우면 나머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당연한 단체생활의 논리.
점심시간에도 혼자 클로킹하고 보이지 않게 밥을 먹고 어슬렁어슬렁 다니는데
갑자기 누가 '인호!'라며 내 이름을 부른다.
젠장. 어딘가 미사일 터렛이 박혀있다.
누군가 싶어 얼굴을 유심히 보니 고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친했던 친구였다.
역시 예비군의 참맛은 고향친구를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클로킹을 풀고 친구와 시덥잖은 사는 얘기를 나누며 남은 시간을 덜 심심하게 보낼 수 있었다.
예비군이 끝나고 차를 몰고 나오는 기분은 평상시와는 달랐다.
역시 이 자동차라는 물건이 비싼 이유는 이런 기분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차에서 옷을 갈아입고 롯데마트로 들어간다.
대부분 마누라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온듯한 아저씨들 사이에
나이서른이지만 건장한(내 생각에) 청년 혼자 서있으니 왠지 멋있는 남자가 된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여유도 더 생기고, 그래서 유유자적 롯데마트를 한바퀴 돌아주고
원래 사려던 물건 하나만 달랑 들고 계산을 했다.
난 충동소비는 하지 않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집에 도착하니 어깨와 종아리가 너무너무 아프다.
내가 한거라곤 그냥 예비군복 입고 앉아 있는 것 밖에는 없는데
역시 군복이 재앙이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수박한입 베어물고는 요가센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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