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아빠에게 "난 요즘이 나 살면서 젤 행복한 것 같아"라고
보신탕을 먹으며 얘기한 적이 있다.
아빠와 나는 보신탕을 매개로 좀 더 친해졌고 하반기에는 취업이든 대학원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어졌다.
비록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똥차이지만 내 차가 생겨서 생활반경도 넓어졌다.
거기다가 최근 운동을 시작하며 의욕까지 마구 넘쳐나니 그야말로 행복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여름이 되고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게 너무 싫어서
한동안 줄곧 도맡아 오던 요리를 손에 놓은지가 꽤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낮잠에서 깨어 물 한모금 마시기 위해 냉장고 앞에 서 있는 내게
오늘은 날씨가 좀 시원하다면서 된장찌개를 끓여먹자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고등어조림 이후 실로 오랜만에 다시 가스렌지 앞에 섰다.
며칠 전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 맛을 기억해내면서 간을 맞추어보았다.
역시 장가 가기 전엔 엄마 입맛이고 장가 가고 나면 마누라 입맛이라는데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엄마 입맛에 길들여져 있나보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김도 손에도 대지 않으시고 된장찌개만 가지고
수북이 쌓인 밥을 빛의 속도로 흡입하셨다.(아빠는 밥을 굉장히 많이 드신다. 내 세 배쯤..)
찌개가 맛있다며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신 아빠를 보며 나는 무척이나 흐뭇했다.
그래. 역시 이런 게 행복이지. 꼭 로또를 맞아야 행복한 건 아니잖아.
주로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신 뒤에는 자기 그릇을 그대로 식탁위에 올려두시는 아빠의 그릇을 치우며
식탁 정리를 끝내고 식후땡을 위해 복도로 나갔다.
보슬비가 내리며 선선한 바람이 부는, 모처럼 살기 좋은 여름날이다.
선선한 바람을 즐기면서 하얀 연기를 후후 뿜어내다가
문득 요가원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운동도 더 되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피워가던 담배를 얼른 꺼버리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아빠, 자전거 구할 데 없을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더 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참. 내가 저기 가봐야 몇일이나 더 가겠어."
나는 요즘 서울에 있는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있다.
대학원에 가기보다는 2년의 경력을 쌓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업계 종사자의 조언에 따라
가방끈의 유혹을 뿌리치고 취업지망생이 되기로 한 것이다.
빠르면 내일이라도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갈테고
정말 빠르면 그 길로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한창 대한민국이 애국심으로 들끓을 때,
나 역시도 한국 축구에 열광하며 학교 앞 바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한참 경기에 몰입해있는데 맥주를 주문하는 손님들이 정말로 미웠지만
그 때 내가 슬펐던 건 경기를 몇십 초 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점점 서울 사람이 되어가는 나를 보면서
'이제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사는 건 끝이 났구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을 한 것도 아니었고 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했지만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앞으로 오롯이 혼자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는 걸 그 때 알게 되었다.
미처 내가 마음을 먹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된 백수 생활이 나에게 그 생활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서른살 철부지에게 부모님 그늘에서 살며
유유자적하며 행복해 할 수 있는 생활을.
이번에는 이제 집을 나서면 정말로 부모님과 같이 살 날이 없다는 걸 알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30년 내공이 쌓여서 그런지 2002년 어느 바에서 내가 느꼈던 슬픔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살아온 중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찬란했던 반짝이던 눈동자여
사랑했던 날들이여 이젠 안녕
최근댓글